채만식의 태평천하
채만식의 태평천하를 제대로 읽은 기억이 없어서 이번에 읽게 되었다.
오랜만에 기차를 타고 울산에 가게 되었는데 가는 동안 책이나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왕복 오가는 시간을 고려해서 너무 가볍지도 그렇다고 너무 무겁지도 않은 책 중에 분량이 제일 적당해서
선택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책 태평천하
그러나 제대로 읽은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싶은 그런 책이다.
수능이나 내신을 위한 공부에 대한 수단이 아닌 독서에 대한 순수한 목적으로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 줄거리
주인공 윤직원 영감은 일흔 살이 넘었다.
겉으로는 만석꾼에 떵떵거리고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내는 갑갑하기 그지없다.
윤직원 영감은 하루라도 욕을 안 하고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고
고집불통에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이다.
그의 아들 윤주사는 일찍이 첩을 얻어 따로 살고, 그의 큰 손자 역시 군수자리 노리고 지방에 내려가 살면서 주색에 빠져 있고 동경 유학 중이자 경찰서장이 될 거라 믿는 윤직원 영감의 희망인 종학은 사회주의가 되었다.
윤직원 영감에게 사회주의란 부잣집 재산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 나눠주는 패악무도한 사상이다.
요즘 같은 태평천하에 사회주의라니.
윤직원 영감의 탄식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2. 감상
시대적 배경이 일제 강점기인데 윤직원 영감의 일상만 보면 태평하기가 그지없다.
일제강점기라면 다 같이 힘들게 살았을 거라 생각하는데 자신의 안일만 생각하는 윤직원 영감에겐 태평천하의 시절이 따로 없다.
돈만 밝힌 졸부답게 그 집안싸움을 보면 기가 막히다.
윤직원 영감은 며느리 고씨를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하며 막 대하고, 고씨 또한 윤직원 영감을 시아버지는커녕 오직 안방 차지하고 앉은 늙은이로 치부하기에 이 둘의 사이부터 뭔가 심상치 않다.
윤직원 영감네는 과부 아닌 과부가 모여 산다.
시집갔다 남편이 죽어서 돌아온 진짜 과부이자 윤직원의 딸 서울 아씨
아들 윤주사의 처이자 며느리 고씨
윤주사가 첩을 얻어 산 후부터 본처에게는 발길을 끊어서 과부 아닌 과부가 되었고
윤직원 영감의 두 손주며느리 또한 남편은 있지만
한 명은 첩질로, 한 명은 유학길에 결국 윤직원 영감네는 과부들의 집인 것이다.
윤직원 영감은 당최 부끄러움이라곤 모르는 인물이다.
손녀뻘 되는 아이들을 욕정의 대상으로 본 것부터가 인물의 타락성을 나타낸다.
몇 번이고 거절 당해 민망한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포기를 모른다.
돈에 눈이 멀었지만 그 돈은 결국 자식과 손자들에겐 독이 된다.
겉으로는 만석꾼 부자이지만 안으로는 이미 썩을 대로 썩은 집안이다.
윤직원 영감이 말하는 태평천하는 모두가 망하고 자신만 잘 사는 삶이다.
윤직원 영감이 오늘날 환생하면 누가 될까?
주변이야 어찌 되든 말든 자신만 잘 살면 되는 누군가가 되었으리라.
사투리가 많이 나오고 요즘은 안 쓰는 용어들이 자주 등장해서 읽기에 수월하지는 않았다.
이야기의 큰 서사는 없지만 한 챕터가 짧아서 지루하지 않게 넘어간다.
말도 안 되게 어이가 없는 장면이나, 억지 부리는 윤직원 영감의 막무가내식 행동들을 보면서
염치라곤 일도 없는 인간의 표본을 보는 것 같아 부아가 치밀기도 했다.
남존여비의 사상이 지배하는 시대적 배경도 한 몫했으리라.
제목은 태평천하인데 위태로운 태평천하이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리 없는 그런 태평천하.
고집불통 수전노에 인색하기 그지없는 음흉한 윤직원 영감이 자꾸 누군가와 오버랩되는 건 왜일까?
그에게도 지금이 태평천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의 태평천하가 아닌 누구에게나 태평천하가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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